(접수번호19)
‘걷쥬’로 아침을 열다
- 걷기, 그 행복한 하루의 시작 -
광기천의 새벽이 밝아온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기온이 올라가면서 하얀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문득 푸드득하면서 풀섶에서 잠을 자던 물오리들이 낯선 불청객의 인기척에 놀라 황급히 물속으로 뛰어든다. 어제보다 숫자가 더 불어났다. 이제 며칠 뒤면 저 물오리들도 무리를 지어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갈 것이다.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옷소매 끝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귀마개가 붙은 모자와 마스크, 그리고 장갑을 챙겨들고 새벽 6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이 시간이면 어둠이 가시고 겨우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길 위에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새벽을 열어젖힌다는 기분으로 혼자 걷기를 시작한다. 내가 다니는 길은 광기천변으로 이어지는 농로이다. 주변에는 비닐하우스가 널려있고 추수를 끝낸 텅 빈 논밭들이 을씨년스런 늦가을 풍경을 스산하게 보여준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과정도 아마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그저 막연하게만 보이는 미래를 향해서 작은 꿈 하나를 간직하며 홀로 그렇게 살아왔으리라. 생각하면 지금까지 살아 온 날들이 모두 불안정하기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 때문에 고향을 떠났고, 타향에서 직장을 잡아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직장을 은퇴한 지금은 또 낯선 시골에 터를 잡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인생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었다고 하여 현실에 안주할 수는 없다. 내게는 아직도 소중한 꿈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해외봉사를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단원이 되어 재작년에 우즈베키스탄에 파견된 적이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5개월 만에 귀국을 했고 지금은 몽골로 재파견되기 위해 몽골어를 공부하고 있다. 처음 보는 외국의 낯선 글자가 무척 어색하지만 봉사를 위해서는 극복해야만 한다. 나는 바쁘게 길을 걸으면서 호주머니에서 깨알같이 적은 몽골어 단어장을 꺼내든다.
혼자 걸어가는 새벽길은, 오십년 전 내가 이십 리 길을 걸어 학교에 오가면서 영어단어를 외우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처럼 지금도 나는 새벽길을 걸으면서 몽골어 단어를 외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기억력이 약해져 지금은 아무리 되풀이하여 암기를 해도 자꾸만 잊어버린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외우다 보면 더러 머릿속에 남는 것도 분명 있을 터이다.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몽골어 단어장을 힘주어 잡는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걷기를 시작한 것도 해외봉사 때문이다. 처음 봉사단원에 지원하여 신체검사를 받을 때, 나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약간 높게 나와서 재검을 받기에 이르렀다. 물론 재검에서 통과가 되기는 했으나 그 일은 항상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가장 좋은 운동은 걷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걷쥬’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곧 그 프로그램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결국 나는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먼저 ‘걷쥬’ 프로그램에 따라 하루에 1만 보 이상 걷기, 아침식사는 밥 대신 야채와 과일만 먹기, 점심과 저녁은 잡곡밥 먹기, 되도록 육식을 줄이기 등이 그것이다. 그렇게 생활한 지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몸에는 신기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몸무게가 6kg이나 줄었다. 뱃살이 쏙 빠지고 허리가 가늘어졌다. 얼굴이 갸름해지고 건강에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콜레스테롤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또한, 무엇보다 기분 좋은 것은 이제는 그동안 아프던 오른쪽 무릎이 훨씬 덜하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무릎 때문에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니 퇴행성관절염이라고 했다. 의사선생님은 걷기나 수영, 자전거 타기 등을 권유하였다. 그러던 중 TV를 보다가 걷기를 많이 하면 무릎 연골 주변의 근육이 강화되어 걷기에도 불편함이 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걷기를 통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특히나 ‘걷쥬’ 프로그램은 걷는 사람들의 기록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은근히 경쟁심이 생기게 한다. 무슨 일이든지 막상 하게 되면 욕심이 생기는 법이 아니던가. 하지만 좋은 등수 안에 든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 ‘걷쥬’ 프로그램에 가입한 사람들이 20만 명이 넘는다는데 그곳에서 내가 등수 경쟁을 하는 것은 분명 욕심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범위를 좁혀 내가 사는 지역에서만 경쟁을 하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시골이라서 경쟁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욕심이 생겨났다. 비콘을 찍는 재미에 빠져 천안지역의 ‘스탬프 투어’를 경험하게 되고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시간의 여유가 생기는 날이면 아산의 신정호수를 찾아 걷기도 하고 때로는 당진의 솔뫼성지길을 찾기도 했다. ‘걷쥬’에 소개된 장소는 대개가 그 지역의 명소이기에 구경거리로도 안성맞춤인 곳들이 많다. 코스도 멀지 않아서 대개 1시간 내외의 거리이다. 준비물은 가벼운 배낭에 물 한 병과 건빵 한 봉지를 챙기면 충분하다. 길을 걷다가 출출하면 건빵을 꺼내 먹고 물을 마시면 된다.
그렇게 걷다 보니 좋은 점도 많다. 가끔씩 집으로 소포가 배달되는데 때로는 김이 들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잡곡이 들어 있기도 하다. 물론 ‘걷쥬’ 측에서 보낸 것들이다. ‘걷쥬’ 앱을 핸드폰에 깔고 걸어 다니면 자동으로 걸음 수가 기록이 된다. 그리고 본인이 신청한 챌린지의 목표 걸음 수가 채워지면 포인트가 주워진다. 그 포인트는 필요에 따라 사용하면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추첨을 통하여 가끔씩 건강 상품이 배달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니 내가 ‘걷쥬’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프로그램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요즘같이 자가용이 많은 시대에 누가 걸으려고 하겠는가? 그리고 매일 같이 빠지지 않고 일정한 걸음수를 꼬박꼬박 채우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매일 같이 1만 보 이상을 걸으라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정하여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실천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길은 어느새 탑원교를 지나 기도원에 가까워진다. 곧 반환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반환점까지는 집에서 약 3,700걸음이니 그곳에서 다시 집까지 오면 7,400여 걸음이 된다. 시간으로 치면 1시간 정도가 걸리는 셈이다. 그러나 매일매일 같은 구간을 걷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컨디션과 날씨에 따라서 약간의 코스 변경이 있다. 그러기에 걷는 구간마다 걸음 수를 미리 정리해 두었다. 그 중에서 상황에 따라 알맞은 구간을 선택하면 된다. 그리고 나머지 부족한 걸음은 집안일을 하면서 1만 보를 채우게 된다.
나는 반환점을 지나 다시 탑원교를 건넌다. 농로라고는 하지만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서 걷기가 편한 길이다. 또한, 광기천변으로 이어진 주변의 경치도 아름답다.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탑원교를 건너 조금 더 가다가 만나는 풍경이다. 이 때쯤이면 멀리 동쪽 산 위에서 서서히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햇살을 받은 광기천은 더욱 짙은 물안개를 만들어 낸다. 비로소 오늘 하루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간이 되면 나는 마치 아침이 마치 나로부터 시작되는 듯한 착각에 빠져 나름대로의 달콤한 희열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아침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저 해를 보려고 이 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은 더욱 빨라진다. 드디어 대문 앞이다. ‘걷쥬’를 보니 걸음 수는 예외없이 7,400여 걸음이고 시간은 약 1시간이 지났다. 문득 오늘 하루도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나의 행복한 하루가 이렇게 ‘걷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 걷기는 아마도 내년에 내가 몽골로 재파견이 된 후에도 계속되리라고 생각한다. 대문을 들어서는 발걸음이 가볍다.